트루먼 여행객
KSVK
헬레나, 왜 이번 무도회에 불참하려 하지?
좀처럼 없는 기회잖나. 지금의 신분을 내려놓고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는데.
군수 일이 너무 바빠서. 그리고, 너희의 드레스는 거의 다 완성됐지만 내 건 아무래도 늦을 것 같거든.
아 참, 네 드레스 배송와서 방에 두었으니 시간 날 때 입어보렴.
이거로군? 알았다.
으음...? 이 사이즈, 정말 내 것 맞나?
전혀 안 맞는데.
혹시 수치 잘못 보내진 않았니?
그럴 리가. 출고 데이터를 그대로 복사해 제출했는걸.
지금 바로 수정 요청해도 늦지 않으려나 모르겠군.
내 기억이 맞다면, 연회는 내일모레잖니?
원단도 전부 지휘관님이 일괄 주문한 거고.
그래. 그리고 QBU-88이 받은 원단을 딱 맞춰 전부 썼다 하니, 한 벌 더 만드는 것은 분명 무리겠지...
어떡하지? 사이즈가 작아서 못 입지만, 그렇다고 안 입자니 연회의 드레스 코드니...
다른 방법은 없어?
달리 준비한 옷도 없고, 다른 이에게서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그렇다고 평상복 차림으로 가면 분명 분위기를 망칠 텐데...
창고에 작은 소체 두지 않았어?
그렇긴 하다만, 최근 임무에서 그 소체는 불편해서 이걸로 다시 교체했다.
그 소체로 입어보면 어떨까? 어쩌면 사이즈 맞을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밖에 없겠군...
걱정 마, 딱 맞을 거야.
응?
어서 입어보렴, 좋은 소식 기다릴게.
거참... 정말 이 소체에 딱 맞을 줄이야.
이것이 바로 운명이란 건가? 역시 하늘도 가끔은 기도를 들어주는군.
KSVK가 창고의 문을 잠그자마자 발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야?
어...?
음... 경보가 안 울렸다는 건, 시스템에 등록된 사람이란 뜻인데...
날 못 알아보는 건가?
근데 너, 어째 낯이 익다?
그런가?
KSVK랑 닮은 것 같은데...
...그녀와 닮은 건 당연한 일이죠.
같은 모델인가 보네.
혹시 자매니?
저기, 당신의 성함이...?
AR-15, KSVK의 직장 동료지. 걔 찾는 중이야?
네, 부탁드려요. 여긴 처음이라 길을 모르겠어요.
이 무슨 신선함인가! 계속하고 싶구나!
그렇구나.
그럼 일단 접객실로 갈까? 여긴 창고야.
감사합니다.
AR-15에게 이렇게나 친절한 면이 있었다니! 평소엔 어림도 없을 모습이로군!
그전에 본인한테 연락하고.
...뚜루루루...
KSVK의 벨소리가 울렸다.
......
......
...하.
동생이라.
촬영장의 설치가 끝났다. 확인했나?
말 돌리지 마.
아니 들어보시게, 소품도 잔뜩 준비해서 예술적인 사진도 찍을 수 있도록 꾸며놨어.
M200에게 도움을 청했지. 이 분야에서 연구한 것이 많아, 실물보다 더 실물같이, 더 화려하게 촬영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건데?
필시 렌즈와 조명, 필터의 조화겠지.
한번 찍어보겠나?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고.
AR-15는 뒤돌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여성이 사진에 끌리는 것은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군. 콩테에서 카메라까지, 한순간의 미모를 기록하는 행위는 영원하리니.
...그나저나, 이렇게 장난을 치는 것도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구나.
내가 평소에 너무 고지식했던 것일까? 궁금해지는군...
분명 모두가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어.
하하하, 이게 바로 악마의 속삭임이란 것인가? 참으로 흥미로워!
연회장을 밝히는 조명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리고 회장에 흐르는 음악은 봄바람처럼 소녀들의 주위를 감돌았다.
어... KSVK 씨 맞죠? 언제 새 소체 준비하셨어요?
이런, 너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더니만.
통신 접속 유지하면 식별 신호를 볼 수 있어요.
식별 신호가 KSVK니, 소체를 바꿔도 당신이죠.
아하, 그렇군! 말 나온 김에 신호도 위장해야겠어.
제법이구나, M200.
아뇨, 이 정도야...
그런데, 누굴 골탕먹일 셈이에요?
딱히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날 말리지는 않는군?
네? 아, 네, 너무 심한 장난만 아니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흐음...
그래도 화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는 자는 쾌락을, 당하는 자는 울분을. 세상 모든 것은 다 등가교환이지.
허나 걱정 마라,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 테니까.
그럼 괜찮아요.
그래서 말이다만, 네 도움을 받고 싶다.
네, 좋아요.
저번에 말한 촬영 말이죠? 카메라는 준비됐어요.
그래, 다만 나를 좀 더 많이 찍어 주길 바란다. 내가 장난치는 장면을 찍는다면 더더욱 좋고.
어... 노력해볼게요.
바 카운터.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만큼 장난치기에도 좋은 곳이다.
킬리안 로즈 한 잔 만들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추가 요구 사항 있으십니까?
아뇨, 그쪽 표준대로 해 주세요.
이런 이름의 칵테일은, 분명 사람을 심취하게 하는 맛이 나겠죠?
못 들어본 목소리! 신입인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인형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바로 Saiga-12였다.
안녕~? 어머나, 많이 낯익은 미소녀네!
저요?
아직 알아채지 못한 것 같군.
그때, 연회장의 조명이 일제히 팟 하고 꺼졌다.
앗?
벌써 댄스 타임이었나?
릴렉스 릴렉스~ 좀 있으면 댄스 타임인데, 그냥 하기엔 너무 밝아서 불을 끈 거란다~
그랬군요... 고마워요.
천만에~ 그런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니?
혹시 KSVK랑 닮았다 생각하세요? 제 언니예요, 닮은 것도 당연하죠.
그래!? 그, 그럼... 왜 걔가 널 여기 혼자 뒀니?
언니가 오늘은 일 때문에 바쁘다면서 저한테 초대장을 양보했어요.
제 이름은 드셰브니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드셰브니... 예쁜 이름이네.
아주 쉽게 속아넘어갔군... 그런데 솔직히, 이렇게 쉽게 속을수록 들통났을 때 더 크게 화내는 법인데. 나중에 어떻게 사과한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자, 조명도 그에 맞춰 반짝였다.
주문하신 킬리안 로즈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넌 춤 추러 안 가?
전 춤 안 춰요.
에이, 댄스 파티인데 춤을 안 추면 아깝지.
봄이 와도 고집 부리며 잠에서 깨지 않는 꽃이 있는 것처럼...
무도회에 왔다고 꼭 모두를 따라할 필요는 없죠.
그야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으니까 그렇지.
해보지도 않곤 좋은지 싫은지 모르잖아?
...언니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열정적인가요?
아아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 그게... 나랑 네 언니는 직장 동료잖아? 언니 대신 널 돌봐줄 의무가 있어.
모두가 춤추니까 너도 하라는 게 아니라, 재밌으니까 같이 추러 가자고 권하는 거야.
...실은 저, 춤출 줄 몰라요. 제일 간단한 왈츠도 못해요.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왈츠가 얼마나 쉬운데!
정말요? 전문 학원 같은 데서 배우는 사람도 있다던데.
정말로 쉽다니까! 드셰브니, 네가 달을 쫓는 장미라 생각해 보렴. 바람을 맞으며 동그란 달의 그림자를 찾는 장미.
네 치마가 빙글 돌면, 정말 예쁜 장미 같을 거야.
네 손의 그 킬리안 로즈랑 정말 잘 어울릴걸?
장미라, 이건 또 재밌는 비유로군.
들켰을 때의 천벌은 무시무시하겠지만, 이래서는 그만둘 수가 없어!
여기까지 듣자, DP12는 정리하던 물자를 내려놓고, 미소짓고 KSVK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쨌는데?
그리고 난 연회로 돌아갔지.
Saiga가 마음에 들었나 봐?
어... 그게 무슨 뜻이지?
Saiga가 너랑 밖에서, 그것도 단둘이서 댄스를 권했잖니.
그리고 넌 그걸 받아들이고, 정말 나가서 추려 했어.
그때 M76이 와서 들키지만 않았어도, Saiga는 영영 진실을 알지 못했을걸?
변장을 했으니, 평소처럼 행동할 순 없지 않은가.
그 말도 너답지 않네.
소체를 바꾸면서 마인드맵도 덩달아 변한 것 같아.
...어쩌면, 나도 몰랐던 숨겨진 일면이 수면 밖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르겠군.
예전에 이렇게 장난칠 기회도 없었으니 말이지... 그렇게 즐거울 줄은 상상도 못했어.
조그만 장난은 삶에 감칠맛을 더하는 조미료라잖니.
일리 있는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사과하는 뜻으로 함께 티타임을 가지자 했다.
응? 그렇게 된 거였어?
그래도 우리 드셰브니가 또 새 친구를 사귀어서 정말 기쁘구나.
따끈따끈한 얼 그레이에 치즈 케이크. 이보다 더 좋은 티타임이 또 어디 있을까?
정말로 화 안 났나?
화 안 났어.
어째서지?
KSVK니까. 무슨 짓을 해도 귀여운 KSVK니까.
귀엽다? 나를 그런 단어로 형용하다니... 너도 참 희한하구나.
아니 진짜 귀엽대도? 단지, 네가 날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돼서 그래.
내가 널 싫어할 리 없지 않은가.
장난에 당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쪽이야말로 "귀엽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지만 말이지. 나마저도 할 수 없는 일이야.
그, 그럼 내가 제일 아끼는 거 빌려줄까?
이건... 앨범?
응! 내가 제일~ 아끼는 거! 이거는 다른 사람한테 보여 주는 게 네가 처음이야!
지휘관한테도 보여 준 적 없어!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우후후... 미소녀와 함께 다른 미소녀들을 감상한다, 얼마나 은밀하고도 즐거운 일이니?
함께 은밀한 일을 하면서 거리감을 좁히고, 친구가 된다는 뜻이로군.
어? 아니, 내가 이걸 빌려주면 나중에 돌려줘야 하니까――
그럼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고――
후훗, 에둘러 말하려 할 것 없다.
그럼 다음 주말에 또 만나도록 하자.
정말!? 응, 그러자!
우와아, 앨범 빌려 주지 않았는데 더 좋은 약속을 얻어냈어!
아무래도, 나도 여태까지 너무 고지식했던 모양이군.
먼저 호의를 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귀여운 일이었어.
그말은 즉! 미소녀에 관해서 우리 의견이 일치한다는 거네?!
어... 그리 이해해도 되겠지.
숙소에서, DP-12가 안부 전화를 걸었다.
잘 놀았니?
꽤 재밌었다만, 역시 그 이상한 앨범은 거절했어.
즐거운 데이트였나 보네~
그나저나, 아직도 왜 내 신체 수치가 잘못 전송됐는지 모르겠다. 우연이라기엔 그 소체와 딱 맞았고...
설마, 헬레나 너...?
얘도 참, 연회 끝난 지도 한참 됐는데 아직도 마음에 두긴.
그래그래, 방금 M200이 사진을 잔뜩 보내 줬단다.
음, 잘 보관해 둬야지.
두번 다신 못할 장난이었지만... 정말 즐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