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니움
PA15
고생 많았어.
저희가 마땅히 할 일인걸요.
이 화물만 옮기면 대강 다 마무리됩니다.
지휘관님은 따로 하실 일 있나요?
할일? 글쎄, 딱히 예정도 없으니 계속 너희 일을 거들어 줘야겠지.
내가 왔을 땐 이미 너희가 일을 거의 다 끝마쳐서, 전혀 도와주질 못했잖아.
오히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애당초 다 저희가 맡은 업무였는걸요.
그래도 꼭 뭔가 하고 싶으시다면, 회장 안을 둘러보시는 건 어떤가요?
휴식 중인 인형을 보면 칭찬도 해 주시고요.
그럼 모두 기뻐할 거라 봅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겠지.
다른 애들도 쉬는 중이니?
네, 아직 화물 포장 업무 중인 PKP와 SPP-1을 제외하면 다들 휴식 중일 거예요.
너희가 부스를 어떻게 꾸몄는지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그럼 한 바퀴 둘러보고 올게.
여기 일거리도 거의 끝난 모양이니, 너도 마무리 다 되는대로 푹 쉬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음? 저기 있는 건...
T91!
응...? 아.
지, 지지지휘관님!
뭐야, 왜 그렇게 긴장했어?
너도 일 다 끝났니?
기기기긴장했다뇨, 잘못 보신 거겠죠... 그, 그냥 깜짝 놀랐을 뿐이에요.
어... 제 업무는 이미 일단락 지었고, 이제 쓰레기 청소나 도우러 갈까 하던 참이었어요.
지휘관님은 어쩐 일이세요?
아니 그냥 걸어온 걸 보고 깜짝 놀랄 것까지야...
모두 일이 거의 다 끝났다길래, 상황 확인도 겸해서 둘러보면서 너희를 격려해 주려고 왔지.
아... 그러셨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일한 모두를 위해 밀크티를 배달 주문했어요, 조금이라도 피로를 덜어 주고 싶어서요.
기특한 생각이네. JS 9이 그러던데, 너도 함께 기획 총괄을 맡았다면서? 역시 믿음직하구나.
그나저나, 다른 애들은 어디 있는지 아니?
어... 접객팀의 MG34는 아마 입구 근처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수레 같은 걸 한 대 만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그리폰으로 가져갈지 고민이라던데요?
그리고 가구 판매팀의 3명은 지금쯤이라면 다들 로비에 있겠네요. 가구도 거의 다 팔았다니, 그쪽으로 가보시면 금방 찾으실 거예요.
가구 운반 및 포장 담당인 PKP와 SPP-1은 아직 포장 센터에서 일하고 있을 테니, 뒷문으로 가시면 돼요.
정말 자세히 파악하고 있구나.
내가 비행기에서 막 내렸을 때 EM-2의 전화를 받았는데, 일도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좋은 경험도 한 것 같더라.
나머지 두 팀은 어땠을지 모르겠......
그리고 불현듯 위화감이 지휘관의 뇌리를 스쳤다.
...어?
T91, PA-15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알아?
......
T91?
으, 아, PA-15요오...? 걔는 지금 어디 있는지 잘...
바, 바깥에 나가 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 녀석 분명 후방 관리 담당이잖아, 밖을 왜 나가?
...혹시 뭐 숨기는 일이라도――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밀크티 주문할 때 JS 9 걸 빼먹었네!
걔가 자기만 따돌리는 거냐고 화내면 어떡하지?!
죄송해요 지휘관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어, 야! 기다려!
아주 꽁무니 빠지게 도망쳤네... 역시 뭔가 숨기는 게 있구만.
확실히, 여기 와서 PA-15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네.
정말 또 무슨 사고라도 쳤나?
지휘관은 잠시 고민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찾아보자.
후방 관리니까... 창고에 있으려나?
네가 숨어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나 꼭꼭 숨었을 줄은 몰랐다. 한참을 찾았잖아.
숨기는 누가 숨었다고 그래? 난 그냥 여기서 얌전히 쉬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런데 한참을 찾았다니, 지휘관이야말로 스토킹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런 일이 네 성미에 맞지 않을 게 뻔해서, 이렇게 일부러 상황을 보러 온 거야.
하하하, 날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지휘관.
좋아 좋아, 부하를 이해하는 것도 상급자 된 사람으로서 아주 중요한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지휘관의 관심을 감사히 받을게.
너희를 이해하는 것도 내 업무의 일환이니까.
그런데 네가 이렇게나 얌전하게 있다니, 일이 그렇게 힘들었어?
장난도 안 치고, 별일이네.
왜, 내가 장난치길 기대했어?
하,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 없어.
에이~ 뭐야, 시시하게.
후방 관리가 역시 지루했나 봐?
그야 당연히 지루해 죽는 줄 알았지.
이딴 일이 뭐가 재밌겠어?
그럴 거 같더라. 하지만 일손이 부족했는걸 어쩌겠니.
그래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구나. 정말 잘했어.
포상으로, 잠깐 같이 놀아 줄게.
헤에...? 평소엔 뭣 좀 하자면 도망치기 바쁘던 지휘관이 직접 나랑 놀아 주시겠다?
나 살짝 감동 먹었어.
고생한 보람이 없진 않은가 보네.
그럼――
허나 거절한다.
뭐어?
지휘관이 신경 써서 놀아 주겠다니 정말 기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대답은 "No"야.
피곤해서 영 놀 기분이 아니거든. 그냥 쉬고 싶어.
......
지휘관은 PA-15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야... 알았어, 그럼 쉬고 있으렴.
철수할 때 연락할게.
고마워.
그래도 방금 초대한 건 예약으로 칠 거니까, 다음에 내가 찾으러 갔을 때 도망치지 마.
어휴, 마음대로 하셔. 난 이만 다른 팀의 상황 보러 간다.
지휘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하고 떠났다.
그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서, PA-15는 지휘관이 떠나는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휘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푸하아! 아슬아슬했네.
들키진 않았겠지?
PA-15가 크게 숨을 토해내면서 조심조심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의자에서 삐그덕 소리가 났다. 결코 PA-15의 몸무게만으로 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와와와! 또 망가지면 안 돼! 어떻게 다시 조립한 건데!
다행히, 의자는 살짝 흔들리기만 했다.
휴우... 다행이다.
하루 종일 이거 숨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문제가 생겨선 안 되지, 암.
위태롭게 삐그덕거리는 의자를 보며, PA-15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건 참으로 인상 깊은 광경이었다...
T91이 동료들에게 식사 배급을 하러 가, PA-15는 홀로 물자 간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간수라곤 하지만... 누가 이런 걸 훔쳐간다고 그래?
가구에 먹을 거에 폭죽에, 아무리 봐도 좀도둑이 눈독 들일 만한 물건들이 아닌걸.
아 뭐 저 가구는 확실히 비싸 보이지만, 저렇게 커다란 걸 어떻게 훔치겠어.
음식도 두말하면 잔소리지. 배고파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닌 이상에야 이런 데까지 와서 이런 걸 훔쳐 먹으려는 도둑이 퍽이나 있겠다.
......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이거겠군.
산처럼 쌓인 폭죽을 보며, 마침 심심하던 PA-15의 마음이 흔들렸다.
폭죽도 딱히 훔쳐갈 사람이 없지. 하지만 이렇게 많은 양이, 실수로라도 한꺼번에 폭발하면 큰일나겠지...?
어우, 상상만 해도 짜릿해...
PA-15의 머릿속에서, 저 산더미 같은 폭죽들이 터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만약, 자기 뒤에서 이런 멋진 불꽃이 타오른다면 어떤 느낌일까?
제일 강력한 폭죽을 의자에다 묶어서... 후후후...
분명 끝내줄 거야. 어... 그런데 역시 좀 위험하려나?
멍하니 폭죽 더미를 바라볼수록, 그녀의 마음속 잡념도 점점 더 커져 갔다.
......흥, 다 날 이렇게 지루하게 만든 녀석들 잘못이야.
당장 해봐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PA-15는 어디선가 구해 온 의자에 온갖 폭죽을 단단히 묶었다.
이왕 할 바에야 최고로 화려하게. 이것이 PA-15의 원칙이다.
유폭 일어나지 않게 다른 폭죽은 다 격리 조치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걸?
킥킥킥, T91한테 들켰다간 큰일나겠네.
PA-15~ 나 왔......?!
야 너 지금 그게 무슨 짓이야아아아!!?
오호,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무슨 짓이냐니, 보면 몰라?
엄~청 재밌는 일이지♪
네, 알겠습니다.
여기 이 밀크티 다 마셔도 좋으니 제발 그만둬 주세요.
뭐야, 갑자기 웬 존댓말?
이게 얼마나 위험하길래?
보통 위험한 정도가 아니지! 제발 부탁이니까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겨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오호라, 그렇게 심각한 일이로군.
그래, 알면 돼애앴!?!???!
PA-15는 능글맞게 씨익 웃으면서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안 돼!!!
너 진짜 왜――
위험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법 아니겠어?
웃기고 있네, 위험하면 피하는 게... 헉!
오호라~
도화선은 순식간에 의자에 묶인 폭죽 더미 안으로 타들어 갔다.
그리고 잠시 아무 일도 없는 듯하더니...
타닥! 타타탁! 타타타타타탁!!
꺄아아아악!!!
우와... 이거 정말...
진짜 굉장한걸! 꺄하하핫!
뭘 잘했다고 웃어!? 저렇게 많은 폭죽이 한꺼번에 터졌다간...!
T91의 뛰어난 반사신경이 빛을 발했다.
T91은 잽싸게 임시 창고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리고...
퍼어어엉!!!
폭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야야... 음, 정말 위험했어.
알...
아?
알면 하지 말라고 조오오옴!!
아하하,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내지 마.
아이고, 예쁜 얼굴이 숯검댕이가 다 됐네.
거기에 인상까지 찌푸리면 못난 찐빵 된다 너?
누... 누구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 됐는데!
어휴 진짜... 기가 막혀서 뭐라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
뭐야, 왜 그래?
이 나무 조각... 왠지 익숙한데.
내 의자겠지.
의자였던 거겠지.
으아아, 망했다...
괜찮아 괜찮아.
왜 네가 날 위로하는 건데...
지금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사람은 너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애교 부리는 거 아니겠어~
너 진짜...
에라 모르겠다...
폭발음도 엄청났으니 분명 다른 인형들이 몰려올 텐데, 그럼 괜히 일거리만 늘어나겠지?
내가 책임진다 해도 분명 다들 도와주려 할 거야.
......
내가 주의를 끌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여기 다 깨끗하게 청소해놔!
그리고 이 의자도 다시 조립하고!
엑... 솔직히 이건 무리잖아.
잔말 말고 해!
에이... 알았어. 그럼 수고해, 공범 씨~
닥쳐! 공범은 무슨!
자꾸 그따위로 지껄이면 확 그냥 지휘관님한테 보고해버릴 줄 알아!
......
아이고, 된통 혼났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사고친 건 사실이니. 나머지 폭죽을 미리 안전한 곳에 옮겨 놓길 잘했어.
그것들까지 함께 터졌으면 창고와 함께 우리까지 통째로 산화했겠지?
PA-15는 아직도 얼얼한 허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끔하게 정리된 창고를 돌아보았다.
휴우, 다 치웠다. T91이 정말로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살았다니까.
아까 지휘관도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던데, 어떻게든 무사히 넘겼으니 됐지 뭐.
그런 걸 지휘관에게 들켰다간 최소 영창감이니 말이야.
하지만... 왠지 좀 아쉽네. 얌전히 굴었으면 당당하게 지휘관의 포상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얌전히 있었다면, 이런 고생도 안 했을 터였다.
모처럼의 정당하게 응석 부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정말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흐으음...
산산조각 난 걸 겨우 다시 이어 붙인 의자를 바라보며, PA-15는 폭죽이 폭발하던 광경을 다시 떠올렸다.
역시, 좀 더 얌전히 구는 것이 좋았을까?
하! 그거야말로 얼토당토않지!
이런 경험은 언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런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
PA-15는 참지 못하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시 부채로 가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면, 그게 과연 PA-15일까?
이렇게 짜릿한 경험을 했으니, 당분간은 무슨 일을 겪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했음은 인정하지만, 그녀는 분명 다음에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릴을 추구하는 자의 원칙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