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취재자
M200
......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M200을 깨웠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에, M200은 허겁지겁 마인드맵의 정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나 숙소의 문을 열었다.
누구세... 어?
안녕.
아, 안녕 QBU.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깜빡한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들어가도 돼?
아, 응, 어서 들어와.
흔쾌히 QBU-88을 들인 뒤, M200은 살며시 문을 닫았다.
뭐 마실래?
오, 마실래! 뭐 뭐 있어?
홍차, 주스, 커피, 우유, 과일차, 생강차, 핫초코, 녹차... 아, 감주도 있긴 한데 데워야 하니까――
그만 그만, 과일차면 됐어.
마실 게 뭐가 그렇게 많아? 스프링필드랑 같이 찻집이라도 차리려고?
으응, 그냥 음료 배합 연습용으로 쓰다 남은 것들이야.
여기 과일차.
고마워.
...오옷? 맛있다! 이거 어디 브랜드야?
응? 내가 직접 블렌드한 건데, 입에 맞으면 좀 줄게.
오오, 정말? 고마워! 새콤달콤한 게 딱 내 입맛이야!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야?
아참참. 아까 그로자가 파티 열 거라면서 일정 올렸잖아?
그런데 넌 임무 있어서 못 간다길래.
아... 응.
그런데 기록 조회해 보니까, 너 임무 받은 때가 파티 일정 게시된 뒤더라?
......
너, 보통 같으면 파티 안 간다고 안 하잖아.
그래서 좀 이상하다 싶었지. 파티에서 만나기 껄끄러운 사람이라도 있어?
아, 아니야!
그... 그냥 사적인 고민이 좀...
뭔데뭔데? 말해 봐.
우으... 사적인 고민이라니까. 다른 사람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일로 폐를 끼칠 순 없어.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너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겠지만, 말해 주면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신세진다거나 그런 거 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처음부터 그러려고 온 거니까.
아... 고마워.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
......
몇 분 후.
그러니까, 난민을 취재하려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응... 올해의 기념 파티 때 모두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전후의 세상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는데...
여태까지 찍은 건 전부... 폐허 아니면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의 슬픈 얼굴뿐이었어...
그야 전쟁이란 게 원래 그렇게 다 때려 부수는 거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
하지만 우린 "안전계약사"잖아.
우리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 평화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거 아니야?
어...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런데 그 광경을 보니... 정말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우린 "전술인형"이잖아? 전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
우리가 아무리 적을 무찔러도, 억울하게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나. 세상에 고통을 더 만들어낼 뿐이야...
우린 전쟁을 계속하고 있어... 전쟁을 끝내지 못해...
윽, 되게 심오한 고민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적들을 내버려둔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럴까...? 그렇겠지? ...헤헤, 털어놓고 나니까 한결 개운해졌다.
정말 고마워, QBU. 다음 파티엔 꼭 참여하도록 할게.
잘됐네.
...엥? 잠깐, 이번 파티 안 간다는 거야?
응? 어, 아쉽지만 역시...
어휴 이 바보야, 바로 눈앞에 직빵인 해결 방법이 있잖아! 목표를 처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안 그래도 그 버려졌는데도 전장에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기갑 유닛들 짜증나던 참이니까, 우리 둘이 먼저 가서 싹 해치워 버리면 금방일 거야! 얼른 해치우고 편하게 놀고 싶어!
아... 응.
정말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있을까?
그 임무 위치 어디야? 보자 보자...
아! 3번 전투 지역이 여기서 제일 가깝네, 어서 가자!
어? 지금 당장?
싸움은 속도가 생명이라고!
즉석에서 결정한 두 인형은 다른 동료를 더 부르지 않고 서둘러 목적지로 달려갔다.
한 시간 후, 3번 전투 지역.
역시 버려진 녀석들은 오합지졸이라 상대하기 쉽다니까. 이걸로 임무 끝이지?
응.
M200은 총을 내려놓고서 주변에 쓰러진 기계들의 잔해를 둘러봤다.
누가 탄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에이, 그런 건 인간이 본격적으로 진격할 때나 쓰는 물건이지.
어라? 분명 이 주변에 있었을 텐데...
QBU? 뭐 찾아?
아직은 비밀.
QBU-88은 계속해서 주위를 살펴봤다.
흠... 흠흠... 아, 찾았다!
M200! 이리 와서 이것 좀 봐!
QBU-88의 부름에 M200은 쪼르르 달려가 그녀 옆에 쪼그려 앉았다.
허물어진 벽 아래 QBU-88이 가리킨 곳에는, 가녀린 장미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와아... 왜 이런 데에 꽃이 폈지?
실은 여기, 옐로우존 식물 재배 연구소였거든.
전쟁으로 초토화됐지만, 이런 작은 꽃밭이라서 간신히 피해를 면했을 거야.
내가 처음 왔을 땐 꽃이고 뭐고 없었어. 연구원들이 씨앗을 심자마자 강제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나?
그런데 이것 봐, 혼자서 이렇게 잘 자랐잖아!
우리가 여길 잘 지켜내서 살아남은 걸까?
응, 우리가 방어선을 유지한다면 더 많이 필지도 몰라.
......
M200은 한동안 그 활짝핀 꽃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칙칙한 회색빛의 하늘과 재 섞인 진흙 속에서도, 꽃들은 연약함에 굴하지 않고 그 화사함을 뽐냈다.
포화가 휩쓸고 간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거, 사진으로 찍어야겠어!
헤헷, 여긴 이제 안전하니까 실컷 찍으라구.
이런 꽃밭이 여기 말고도 더 있을까?
글쎄... 아마도? 교전지에서 좀 떨어진 곳을 잘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말 나온 김에 당장 찾으러 가볼까?
응!
주변을 살피고 사진을 찍으면서, M200과 QBU-88은 3번 전투 지역의 절반 가량을 돌아다녔다.
오, 여기도 꽃 있다. M20――우왁!?
응? 거기도 있... QBU!!
반쯤 땅에 파묻혀 있던 기갑 유닛이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기동했다.
게다가 아직 일부 기능도 살아있는지, QBU-88을 덥석 붙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구, 구해 줘 M200!!
큰일이다...!
놀란 M200은 카메라를 던지다시피 놓고 총을 쐈다.
하지만 성급한 공격은 외피에 흠집만 내고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바로 그때, 주위의 진흙탕이 진동하더니 더 많은 기갑 유닛들이 땅에서 솟아났다.
왜소한 M200을 에워싼 그 육중한 덩치들에 하늘이 다 가려질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 이건 나 혼자선 감당 못해...
그로자 씨! 여기는 M200, 응답 바랍니다!
M200? 갑자기 무슨 일이니? 파티에 관해서면――
그로자 씨!! 구조 요청합니다!!
......
M200, 우선 진정하렴. 침착하게 상황 설명해.
후우... 3번 전투 지역에서 다수의 폐기 기갑 유닛들과 조우했어요. 일부는 화기 시스템이 살아있는 데다, QBU-88이 사로잡혔어요.
좌표는 지금 전송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 주세요! 부탁드려요!
그로자 씨가 지금 당장 출발하더라도, 여기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걸려... 최소한 10분은 끌어야 해!
먼저 관절을 파괴해야 하는데... 젠장, 장갑이 너무 두껍잖아...!
수 차례의 사격으로 주의를 끌자, QBU-88을 붙잡은 기갑 유닛이 다른 팔을 M200에게 뻗었다.
이에 M200은 곧장 조준 사격을 멈추고,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반격했다.
크윽... 으아아아악!
안 돼... 녀석이 저렇게 계속 경계 상태면 QBU를 더 세게 쥘 거야...
잠시 망설이던 M200은 이내 결심했다.
도주를 멈추고, 총을 바닥에 거치하고 기갑 유닛의 다리의 취약점을 조준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두려움 따윈 없었다. 오직 동료를 구하겠단 일념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기갑 유닛이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M200의 방아쇠가 더 빨랐다.
펑!
맞았다!
기갑 유닛은 털썩 무릎을 꿇었지만... 곧바로 다른 다리로 몸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그 총성에 다른 기갑 유닛들까지 M200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이, 이 녀석 움직인다...? 야! 너 날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야!? 살려 줘 M200!
다시 관절을 노려서... 젠장, 총알이 바닥났어...!
기갑 유닛이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땅을 긁는 소리가, M200의 마음을 할퀴었다.
주위에 몰려든 기갑 유닛들이 앞을 막아섰고, 그녀의 상황 분석 시스템이 경보를 울렸다.
퇴각해야 한다고, 동료를 버리고 도망쳐야만 한다고.
정말 달리 방도가 없는 걸까...
안 돼...! QBU가 붙잡혔단 말이야! 반드시——
M200! 눈 감아!
......!
그 말에 M200은 주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강렬한 섬광이 눈꺼풀을 뚫고 시야를 가렸다. 눈부심이 가시고 나자, 따뜻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QBU-88이...
낟도 앤... 안...
...부상이 심각해요.
너희 먼저 후퇴하렴.
하, 하지만 기갑 유닛의 숫자가 너무 많잖아요, 지원을...
우리만으로 충분하니까, 부상자 데리고 얼른 가.
그리폰에 입사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M200은, 이번이 M16A1과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AR팀에 대해 자자한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M200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믿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세요.
QBU-88을 들쳐업고서, M200은 그로자와 M16A1에게 뒤를 맡기고 왔던 길을 따라 퇴각했다.
싸움... 항상 싸우기만 해...
동료를 지키는 것도 다른 동료가 있어야 하고... 난 정말 싸움 말곤 쓸모가 없는 걸까?
총성이 멀어질수록, M200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그저 망연하게 엉망진창인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때, 선명한 푸른빛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소동이 벌어졌던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길가에, 파란 장미가 피어 있었다.
파란 장미... 기적...
내가 아까 도망쳤다면, 여기도...
......
...다행이다.
......
며칠 후, 연회 당일.
좋았어, 편집 끝. 그냥 파티인데 왜 거창하게 개막식까지 하려는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문제 없겠지?
그때 돌아오고 나서 QBU를 다시 못 봤는데... 지금 뭐하고 있을까?
M200은 입을 다물고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닫았다.
QBU도 분명 파티에 참석하겠지? 그쪽 인형들은 다들 요란한 걸 좋아하고 단체 행동을 중요시하니...
나도 파티에 참석할까? 촬영사 신분이라도 참석은 하는 거겠지?
걔한테, 내가 내린 결론을 말해 주고 싶어...
통신 요청.
응?
여보세요, M200입니다.
M200! 우리 같이 연회 가자!
아, QB... 어? 연회?
내가 네 드레스 만들었어! 얼른 입어 봐!
뭐? 그, 그치만...
나 지금 문앞이니까 문 열어, 빨리!
갑작스런 전개에 M200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리둥절해하면서 방의 문을 열자마자, QBU-88이 그 드레스로 보이는 옷을 들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자, 얼른 입어! 내가 너 주려고 열심히 만든 거야!
에에... 아, 알았어...
어, 어때?
내가 보기엔 괜찮은 거 같은데...
음, 그럭저럭 괜찮네.
그럭저럭... 안 어울려?
아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겸손은 미덕이라구.
아무튼 내가 만들었지만 엄청 잘 어울리네! 오늘밤에 그거 입고 꼭 와! 꼭이야!
폭풍처럼 들이닥친 QBU-88은 다시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M200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살펴보며, 쑥스러운 듯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아, 말할걸 깜빡했다... 그래도 밤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럼 개막식 때 할 여는 말을 이걸로... 응, 당장 수정해야겠다.
......
이 영상을, 제 전우와 특별한 벗에게 바칩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저 파괴할 뿐이 아닌, 의미가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끝낼 겁니다. 그리고 남겨진 폐허 위엔, 새로운 꽃이 피어나겠죠.
이번에 우리가 얻은 것이 짧은 평온일지라도, 진정한 평화는 반드시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언젠가 맞이할 그날을 위해, 모두 함께 건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