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EM2
가구 전시회장의 한가운데.
갑작스레 받은 임무지만, 별문제야 있겠어?
이전에 박람회 같은 임무를 받은 적 있는 인형들도 별로 어렵지 않다고 했으니...
나도 아무 문제 없이 해낼 수 있을 거야.
부스에 도착한 EM-2는 자신에게 할당된 가구들을 카트에서 내렸다.
고작해야 가구 장사인걸. 그리폰의 전술인형에게 이보다 더 편한 임무는 없을 거라고.
음... 우선 이 가구들이 대체 뭔지부터 알아야겠는데...
전쟁 이전의 가구 공장에서 특수 제작한 고급 가구들뿐이라, 크기도 모양도 일반 가구랑 전혀 다르단 말이지...
왜 데이터베이스엔 이런 거에 관련된 정보가 없담?
EM-2는 특이하게 생긴 가구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일단 나란히 정리해서 부스의 모양새부터 내자.
네모난 목재 테두리의 그림판... 문짝 같은 건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EM-2은 병풍을 굳게 닫힌 문처럼 세웠다.
속이 빈 나무 기둥... 서랍인가? 아님 상자?
그런데 열리질 않네... 일단 저쪽 구석에다 두자.
정교하게 짜여진 대나무 걸상은 병풍 곁에 놓였다.
S자 모양의 목제 가구...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거지? 벽장식인가?
어... 일단 이것도 바닥에다...
부드러운 유선형의 자태를 뽐내는 탁상도, 대나무 걸상 옆에 아무렇게나 눕혀졌다.
이건... 아, 자료가 있네!
구식 다이얼 전화기? 19세기, 7~80년대 물건인가...
어디, 사용법은...
전화를 걸어보고자, EM-2이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는 정상...
다이얼을 테스트해보자.
찰칵, 촤르르륵... 찰칵.
......
............
어라...? 왜 소리가 안 나지?
옮기던 중에 어디가 망가지리라도 했나?
EM-2는 당황하며 부품을 검사했다. 다이얼판, 톱니바퀴, 용수철, 조속기...
상태만 보면 거의 새것 수준인데...
부품들은 다 멀쩡하니, 그럼 주파수 문제려나? 으으, 그건 좀 까다로운데...
EM-2는 다시 전화기의 송수신기를 검사했다.
으... 역시 주파수 문제였네. 이 전화기가 쓰는 신호는 이미 도태된 지 오래인 아날로그 방식이야...
작동하지 않는 걸 팔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이얼을 개조할까?
하지만 그러면 아예 뜯어서 스위치와의 연동 구조까지 추가해야 하니, 고장률이 급상승할 테고...
자주 고장날 물건은 팔기도 힘들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하...?!
한참을 씨름하던 전화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 EM-2는 그제서야 부스 주위로 방문객들이 잔뜩 모여든 것을 깨달았다.
이 가구 전시회는 왜 다 인테리어가 엉망이래?
보기만 해도 어지럽다...
저 사람, 뭘 저렇게 만지작거리는 거지?
어, 어라?! 언제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아직 전화기도 못 고치고 가구도 확인 다 못했는데...
EM-2 씨, 여기 가구 배치 아직 안 끝났죠?
어쩔 줄 모르던 EM-2에게, JS 9의 갑작스런 출현은 마치 구세주의 재림 같았다.
아, JS 9 씨! 저 좀 도와주세요...
이 가구들, 생김새가 특이해서 뭐가 뭔지 잘 몰랐죠? 사전 정보 전달이 부족해서 죄송해요.
저쪽에서 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제가 부스를 다시 정리해 줄게요.
JS 9은 망설임 없이 부스의 가구들을 설명하면서 다시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건 병풍이에요. 실내 공간을 나누고 바람을 막는 용도니까...
여기다 둬서 전화기를 놓을 공간을 분리하게 하는 게 좋겠네요.
이건 걸상이니까 힘들면 걸터앉아 쉬어도 돼요.
그리고 이 탁상에다 전화기를 놓으면...
와아...
JS 9의 손길에 점점 정리되어 가는 부스를, EM-2는 그저 감탄하며 지켜봤다.
왜 가만히 그러고 계세요? 가서 옷 갈아입고 오세요.
네? 옷도 갈아입어야 하나요?
그야 당연하죠! 이런 테마 가구 전시회는 판매원도 테마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죠.
얼마나 전시회의 분위기에 녹아드느냐에 따라 판매원의 능력이 드러난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이 부스 정리하는 동안 얼른 갈아입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어... 그 밖에 판매원으로서의 자질은 또 뭐가 있나요?
음... 장사라 해서 무조건 물건을 비싸게 파는 게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키는 거겠네요!
아, 그런데 이건 중요한 만큼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 긴 시간을 들여 숙달하는 거죠.
아무튼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도록 하세요.
그렇군요... 그럼 여기 좀 부탁할게요.
JS 9 씨, 저 왔어요!
우와, 여기 진짜 제 부스 맞아요?
아, 마침 잘 왔어요. 한번 여기에 서 보세요.
오오... 이렇게 서 있으니까, 전화기를 든 느낌이 아까랑 전혀 달라요...
다행이다, 제가 원하던 효과가 제대로 나는 모양이네요.
여기 작업은 이만하면 충분할 테니, 다음 부스를 확인하러 갈게요.
힘내세요, EM-2 씨!
네, 고마워요!
엑, 벌써 저렇게 멀리 갔네...
음? 여기 아까 왔던 곳이지?
맞는데... 아예 싹 다 바뀌었네?
와아... 굉장하다!
손님들이 다시 몰려들고 있어...!
구경해보고 가세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해 주세요!
전화기를 고칠 여유가 없겠는걸. 일단 다른 가구부터 팔자.
약 1시간 후, EM-2는 대부분의 가구를 팔아 많이 한가해졌다.
임무 종료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사람도 없는 틈에 잠시 쉬어도 되겠지?
아차, 아직 전화기를 못 고쳤구나. 작동을 안 하니 이대로 팔 수는 없는데...
전화기에 흥미 있는 손님이 나타나기 전에 얼른 수리하자.
저기, 그 전화기를 좀...
으아아, 말이 씨가 된다더니...
안녕하세요 손님, 죄송하지만 이 전화기는 아직 판매 준비가 덜 된 상품이라서...
아, 사려는 게 아니에요.
네? 그럼 사진이라도 찍으실 건가요?
제 아이가 어디 갔는지 안 보여서, 안내 방송을 부탁해도 될까요?
한참을 찾아봐도 미아 센터 같은 건 없고, 겨우 찾아낸 게 그 전화기라...
어......
그 전화기로 방송 가능하죠?
아이를 찾는 어머니의 초조하면서도 기대로 가득한 눈빛에, EM-2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JS 9 씨가, 숙련된 판매원이라면 어떤 고객의 요구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아직 다 고치지 못했지만, 나와 연결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EM-2는 전화기와 자신을 연결해, 소체를 방송 중계기로 삼았다.
이런 건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데, 괜찮을까...
우선 테스트를 하는 게 좋겠지?
지금은... 방송 가능한가요?
아, 예.
으으으 아직 테스트도 못했는데!
여기서 실패했다간 사흘간은 비스킷이 목에 안 넘어갈 거야...
EM-2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어,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했다.
아, 아 아...?
시끌벅적한 전시회장에, 아주 잠깐이나마 EM-2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됐다! 이걸로 할 수 있어!
우리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빨리 좀 해 주세요.
네, 다 됐어요! 아이 이름이 뭔가요?
밍밍! 밍밍이라고 해요!
네, 지금 바로 안내 방송을 할게요.
아이를 찾습니다. 밍밍 어린이, 밍밍 어린이의 어머니께서 아이를 찾고 있사오니, 밍밍 어린이를 보호 중이신 분은 즉시 1번 카운터로 오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성이 안도하면서 긴장이 풀려 몸을 휘청이자, EM-2은 그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아이도 분명 이쪽으로 오는 중일 거예요.
아, 과자 드시겠어요?
네... 고마워요...
엄마...?
밍밍...?
엄마!
엄마――!!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이에게 달려가 힘껏 껴안았다.
우리 아기, 이제 괜찮아... 엄마 여깄어...
으아앙――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모자를 보내면서, EM-2는 마인드맵에서 기묘한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슨 느낌이지?
동료들과 헤어질 때의 느낌과는 다른데... 과자가 먹고 싶은데 못 찾겠을 때의 기분도 아니고...
혼자 있을 때, 가끔 느끼는 그런 거랑 비슷한...
EM-2가 사색에 빠져 있을 때, 노인 한 명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여기서 전화를 걸 수 있다고 들었는데.
어? 언제 그런 서비스가 생겼지?
아, 설마 방금 그 안내 방송 때문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졌나?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통화비를 받는 걸로 수익을 늘릴 수 있을지도...
좋았어. 기왕 이렇게 된 거, 통화 서비스도 제공하자.
EM-2는 고민을 떨쳐내고, 숙련된 판매원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통화 서비스의 비용은――?!
EM-2가 즉석에서 생각해낸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노인은 지갑을 뒤집어 잔돈을 탈탈 털어냈다.
쏟아진 녹슬고 빛바랜 동전들에, 노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다들 몸에다 통신기를 달잖어...?
난 그럴 돈도 없어서 항상 휴대전화 쓰는 사람한테 빌렸어...
하지만 이젠 통신기가 더 퍼져선지, 휴대전화 쓰는 사람도 적어졌더라고...
그런데 마침 여기서 전화기를 쓰는 곳이 있다 해서.
이 정도면 충분허이? 모자라면 다른 걸...
......
...아뇨, 오히려 너무 많이 주셨어요.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어디로 전화하고 싶으신가요? 전화 번호와 전화를 받을 분의 성함을 말씀해 주세요.
아들한테 전화하고 싶어. 전선에서 근무하고 있거든.
...네?
음? 아니, 요즘은 그 3차 대전이 한창이잖아. 요즘 젊은이들은 나랏일에 관심도 없나 보구만.
3차 대전이요...?
아이고 아가씨, 정말 몰랐어?
며칠 전에 우리 아들이 편지로 나한테, 전선의 야전병원이 만원이라 바빠 죽겠다고 투덜댔거든.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 집 반찬이 그립다더만.
......
그래서 내가 계산을 좀 해봤는데, 오늘은 그 녀석도 반나절은 쉴 수 있을 게야.
그런데 요즘은 전황이 심각해졌는지 통 내 전화를 안 받으려 하더라고.
그러니, 목소리도 예쁜 아가씨가 나 대신 전화 좀 해 주겠으이? 잘 지내냐고만 물어봐 주면 돼.
노인이 건네준 전화 번호가 적힌 쪽지를 보며, EM-2는 망설였다.
3차 대전은 끝난 지 오래라는 걸 확실하게 말해 줘야 할까?
종전된 지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현실을 부정하면서 망상에 빠져 버린 건가?
EM-2가 고개를 들어 노인을 다시 본 순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3차 대전"은 이미 끝났지만, 어떤 이들에겐 영원히 끝나지 않은 일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찰칵, 촤르륵 찰칵.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일슨 의사 선생님이신가요?
아니 또야?! 시도 때도 없이 전화나 걸어대서 그렇게 신고를 먹고도 아직도 안 질렸어!?
당신 아들은 죽은지 10년은 넘었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이젠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걸게 해? 끊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당황한 EM-2가 노인을 바라봤지만, 그는 순진한 얼굴로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어... 안녕하세요, 네일슨 선생님. 저는 가구 전시회의 통화 서비스원입니다.
아버님께서 귀하를 걱정하시는데, 요즘은 잘 지내시나요? 전황은 어떤가요?
뚜... 뚜... 뚜...
아하... 네...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뚜... 뚜... 뚜... 뚜...
아, 벌써 휴식 시간이 끝났다고요?
네, 네 네, 알겠습니다, 꼭 전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몸조심하세요.
EM-2가 수화기를 내려놨다.
우리 아들이 뭐래? 잘 지낸대?
......네.
일이 많아서 너무 바쁜 것 외엔 다친 데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최근에 꽤 큰 전투에서 승리해서 축하 파티를 연대요. 덕분에 잘 쉴 수 있을 거래요.
그래...? 그것참 다행이야...
다른 말은 없었고?
......
아버님께 몸 관리 잘하면서 즐겁게 사시라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해 달라고...
하하하 아이고 그 돼지 녀석, 군대 짬밥이 어지간히도 입에 안 맞나 보구만.
그래, 돌아오면 먹고 싶은 거 다 해 줘야지!
......
아가씨, 정말 고마우이.
...천만에요.
노인은 다시 짐을 들고 느린 발걸음으로 회장을 나섰다. 왜소한 그의 뒷모습은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몇 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아...
이게 바로 인간의 "그리움"이란 감정인가? 아무리 오래 지나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는 감정...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움도 잊게 되지만...
어떤 이들은 아무리 오래 지나더라도,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항상 그리워하는구나.
나 같은 인형은 저런 감정을 느낄 일이 별로 없겠지? 내 동료들은 떠나도 금방 돌아오니까.
설령 그 정도로 슬프고 어찌 못하는 일이 생겨도, 인형은 마인드맵 기록을 청소하는 걸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문득 나쁜 기억이 떠오른 EM-2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지휘관님이 위험한 임무에 나가시고, 난 기지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때...
난 마인드맵 기록을 지워 그 씁쓸한 마음을 버리려 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인간처럼 굳이 괴로운 생각으로 심란해할 필요도 없는데, 왜...
갑자기 시야가 뿌예져, EM-2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세상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도 참, 뭘 이렇게 우울해하는 거야. 그저 지휘관님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고 내 마인드맵은 결국 데이터와 프로그램이잖아. 이런 "그리움"을, 진짜라 할 수 있을까?
지휘관님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뭐라 말하실까?
EM-2의 마인드맵에 익숙한 그 모습이 떠올랐다.
......
지휘관님...
만약 어느 날, 우리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지휘관님은 어떻게 하실까?
나는 어떤 명령을 따르게 될까?
EM-2는 차가운 손으로, 마인드맵 모듈이 위치한 곳을 어루만졌다. 떠오른 그 익숙한 모습은, 말없이 미소지을 뿐이었다.
꼬옥 움켜쥔 수화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EM-2는 눈가를 닦고, 머릿속에 새겨진 전화번호로 연결했다.
한편, 가구 전시회장으로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던 지휘관이 막 비행기에서 내리던 참이었다.
통신기에 통신 채널이 아닌, 전화 수신 알람이 떴다.
전화...? 처음 보는 번호네? 여보세요?
지휘관님...
EM-2입니다.
EM-2? 왜 통신 채널이 아니라 전화로 연락했니? 긴급 상황이야?
아, 아뇨! 별일 아니에요!
그저...
오늘, 사람을 찾는 전화를 대신 걸어 줬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리움에 관해서 고민에 빠져서...
그리움...?
역시 전술인형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상할까요...?
그렇지 않아. 인간이든 인형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한두 개쯤은 있는걸.
이미 지나간 과거라도, 다신 손대선 안 될 금기라도, 붙잡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움이란 그런 생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이야.
제 "그리움"이 그저 연산의 결과라 해도요...?
그렇게 따진다면 인간의 마음도 뇌가 연산한 결과에 불과한걸?
인간도 경험을 전기 신호와 화학 신호로 바꾸고, 두뇌와 신경을 통해 정신이란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기억을 형성하고 감정을 만들어내니까.
......
하지만 그리움 그 자체는 데이터가 아니라 생각해. 그건 그 사람만의 감정이겠지.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곤란해할 것 없단다.
그리움을 느낀다는 건, 네가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품을 정도의 경험을 했다는 뜻이니까. 그건 엄청난 행운이야.
하지만 그리움은 괴로운 것 아닌가요?
오늘 제가 만난 사람들은...
EM-2은 말꼬리를 흐리며 오늘의 기록을 되짚었다.
잃어버렸던 아이를 되찾은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아들의 대답을 듣던 노인은 눈을 반짝였다.
괴로워하면서도... 기뻐했던 걸까요?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일수록 괴롭도록 그립다고들 하는 것 아닐까?
만약 살아가면서 행복한 일만 있다면, 그 행복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해.
괴로움도 있어야,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 수 있어.
그게 그리움의 의미인가요?
글쎄...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리움이란 지금 모두와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라 일깨워 주는 메시지라 생각해.
어느날 갑자기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요...?
그럼 저에게 그리움이란...
저기요, 이 탁상 얼마인가요?
죄송해요, 손님이 와서 끊을게요!
EM-2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휘관은 통신기를 끄고,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에 찍힌 300명이 넘는 소녀들은 모두 카메라를 보면서, 누구는 활짝 웃는가 하면 다른 누구는 무표정으로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리움의 의미라...